[도서 리뷰] 아버지의 삶도 4D로 꿈틀대더라 《아버지의 해방일지》

본문
다짜고짜 만나게 된 첫 문장이다. 그래도 까뮈는 ‘세상을 떠났다’라고 쓰지 않았던가. 번역본이라 그랬을까? ‘돌아가셨다’도 아니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하다니… 제법 강렬한 손짓이었다.
이 문장에 이끌려 270여 페이지를 주말 동안 조각 시간을 모아 읽어 내려갔다. 중간 중간 의도적으로 숨고르기를 해야 했던 이유는 이야기가 품고 있는 들숨과 날숨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전직 빨치산’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를 치르는 3일간,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과 그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를 통해 마치 퍼즐을 맞추듯 ‘인간 아버지의 시대’를 촘촘하게 얽어 내고 있었다. 조문객이 들어올 때마다 그들이 전하는 ‘조의의 이야기’는 숨을 참아가며 들어야 했다.
작가는 ‘빨갱이’라는 참으로 오래되고 손 때 묻은 단어를 툭 툭 던지며 해방 이후 현대사의 아픈 여정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결코 편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인생을 남도의 구수한 사투리로 맛깔스럽게 무쳐낸다.
무엇보다 장례식장이라는 장소, 고인과의 인연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활용해 시대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낸 아버지를 재조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과연 누구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게 됐다. 시간 뒤에 숨은 아버지의 여러 에피소드와 관계를 만나면서 빨갱이 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는 내용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3일이라는 장례 시간과 장례식장이라는 장소가 갖는 의미를 잘 활용했다는 점, 그리고 고인의 마지막에 와서야 한 사람의 인생이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소설의 아이디어와 접근법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 하나 하나가 고인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다다랐다.
이를 엮어가는 문장 하나 하나가 살아 꿈틀대며 필자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다. 누구나 자신만의 사정이 있으니까… 그 사정들이 모여 각각 인간의 삶이 얽히고 얽혀 인생의 판이 짜여지고,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중략)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필자 역시 그렇다. 돌아가신 아빠를 떠올리면 딸이 알고 있는, 그것도 장녀인 필자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소소한 것이었을지. 미처 몰랐던,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된 아빠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해진다.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면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면 알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건 정말 크나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알면서 혹은 추측하면서도 외면해 버린 나날들도 많았을 테니. 그 때는 또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많은 낯선 사람들의 오지랖이 부담스럽다. 당황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끈이 된다. 시골 특유의 촘촘하고 좁은 인간관계는 때로는 아늑하고, 때로는 가혹하게 답답하다.
장례식장에서 얽히고설킨 인간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 하나 하나가 분리된 듯, 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현재와 과거를 널을 뛰듯 오가는 과정에 웅장한 스케일은 물론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라는 표현이 오래 남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비로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고 혹은 화해하며 그리워할 수 있게 된 부녀 사이가 오히려 부럽기도 했다.
작가의 핍진한 서술은 어느 장면 하나 물음표를 찍기 보다 느낌표와 쉼표를 찍게 만들었다. 더불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 작가 자신의 해방일기를 쓰는 듯도 했다. 누군가의 삶은 반드시 누군가와 관계되어 있고, 특히나 부모 자식, 가족의 삶은 절대 분리될 수 없을 테니까.
미래의 어느 날 필자도 필자만의 해방일기를 쓸 수 있게 될까.
<책 소개>
제목 아버지의 해방일지
출판일 2022. 9. 2
작가 정지아
출판사 창비
쪽수 268p
<tomyi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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