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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리뷰] 비오는 날의 제주4.3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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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타임스=MRM 리뷰어]

 

비오는 봄날 제주4.3평화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멋진 풍경과 맛있는 먹거리 투어하기도 시간이 모자랐지만, 4.3에 대해 의미를 왜곡하고 망언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어 이번 제주 방문에는 4.3평화기념관에서 4.3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기념관에 도착하여 차를 주차하다 본 플랭카드입니다.

 

 

주차를 하고 4.3평화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4.3평화기념관 모습은 역사의 진실을 담은 그릇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기념관은 6개의 관과 특별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매월 첫째, 셋째 월요일은 휴관이며 오전 5회 오후 6회 전시해설안내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시해설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이 날은 비가와서 관람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전시해설안내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저는 차분히 돌아보고 싶어서 혼자 조용히 관람했습니다.

 

 

1관 역사의 동굴-프롤로그

 

1관에 들어서면 하얀 비석이 누워있는 공간이 나타납니다.

 

백비 (Nameless Gravestone)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의 4.3에 대한 정의 -

 

 

2관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제2차 세계대전 말 패망이 가까워진 일본은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 결전지로 제주도를 이용하려는 '결(決) 7호작전'을 세우고 일본군 7만여명을 배치하게 됩니다. 이때 수탈과 강제노역으로 피해를 입게되고 제주 전역이 군사 요새화 됩니다. 지금도 그 때 만들어진 알뜨랑 비행장, 해안가 진지 동굴 등이 제주 전역에 상흔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행히 일본의 항복으로 제주도는 전쟁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4일 미군과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 조인식이 진행되었고 무기들은 폐기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훗날 4.3사건이 격화되자, 정부에서는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무기를 제대로 폐기하지 않고 한라산에 대충 파묻어 놓은 것을 산으로 도망간 빨치산들이 획득하여 무장을 갖추었다고 선전하였지만 개연성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일부 흘러나간 총기가 빨치산들의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 4.3사건이 처음 발발했던 당시, 무장대는 약350명 정도였는데 일본제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외 대부분 죽창이나 날붙이 등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경찰지서 습격이나 토벌대와의 교전, 경비대 이탈자들의 무기 제공 등으로 무장이 강화됩니다.

 

해방 후 제주에도 일제타도와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건국위원회 지부가 건립되고 인민위원회로 재편되었는데, 자치조직으로 미군정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모두가 참여하여 대중적 지지와 온건한 정책으로 전국에서 존속기간이 가장 길었다고 합니다.

 

1945년 11월 9일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들어오며 미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정은 치안관리와 재산관리에 중점을 두고 군정업무를 진행했는데, 일제 식민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과 관리를 재등용하여 민심을 자극시켰습니다. 1946년에는 흉년이 들었는데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공출과 다름없는 미곡수집령까지 내려 민심을 더욱 자극하게 됩니다.

 

1947년 2월 23일 인민위원회와 대중정치단체 등을 총망라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제주도지사의 축사와 함께 성황리에 결성됩니다. 일주일 후 민전이 개최한 3.1절 행사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의 발포로 관람군중 6명이 죽고 6명이 총상을 입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제주사회가 들끓기 시작하고 4.3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 제주 도민은 경찰발포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10 총파업으로 항의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조사단을 파견한 후 원인을 남로당 제주조직의 선동이라고 분석하고 제주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규정했습니다.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90%가 좌익색채이다"라고 까지 했습니다. 이 후 경찰 421명이 급파되고 주동자 연행과 고문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제주도에 들어오게 됩니다.

 

 

서북청년단은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키게 됩니다. 그 와중에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된 학생과 청년 3명이 고문치사로 희생되었고, 은폐하려던 경찰의 조작이 밝혀지게 됩니다. 

 

 

3관 바람 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1948년 4월 3일 경찰 탄압에 저항하고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무장대의 무장봉기가 시작됩니다. 

 

 

미군정 딘 군정장관은 4월 17일 경비대 9연대가 진압작전에 나설 것을 명령하며 제주도 군정관인 맨스필드 중령에게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목을 유도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맨스필드는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에게 무장대와의 협상을 명령합니다.

 

대규모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제9연대장은 4월 22일 평화협상을 제의하였고,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김달삼 간에 평화협상이 성사됩니다. 그러나, 협상 며칠 후 오라리에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폭도의 소행이라고 몰아갔지만, 김익렬 연대장은 우익청년단원에 의한 방화임을 밝혀내고 보고를 하지만 묵살되고 미군정의 총공격 명령으로 진압이 시작되며 평화협상은 무산됩니다.

 

 

해방 후 열강에 의해 나누어진 남북은 통일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치루게 됩니다. 이에 김구,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분단정부는 전쟁을 초래한다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합니다. 제주 주민들은 단독선거를 보이콧하고 선거당일 산으로 올라가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 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미군정은 제주도의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명령하지만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재선거도 무기한 연기됩니다.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남북은 각각 정부를 수립하고 분단은 고착화됩니다. 

 

 

 

4관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5관 흐르는 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이념의 누명을 쓰고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고통받던 4.3의 진실은 진상규명의 노력들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2000년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의 서명으로 4.3특별법이 제정되게 되고, 2003년 10월 31일 국가권력을 대표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유족과 제주도민에 대한 공식 사과가 있게됩니다. 그리고, 4.3 희생자유족회와 경우회와의 화해, 국가기념일로 지정 등 진실을 찾고 화합화 상생을 위한 노력들이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6관 평화의 섬-에필로그

 

 

 

 

제주4.3평화기념관을 둘러보며 아픔을 딛고 화해와 상생으로 평화·통일·인권의 상징으로 자리잡도록 하기위한 각계 각층의 노력에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게 됩니다.

 



제주에 방문하게 되신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기념관에 방문해보세요. 제주4.3평화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기념관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현재 제주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을 위한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응원 메시지라도 남겨주시면 등재에 많은 힘이 될 거 같습니다.

제주4.3평화기념관
제주4.3 온라인 추모와 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온라인 응원 캠페인
• 최태성과 함께 만나는 제주4·3평화기념관(상설전시실 전체보기)
박해일 배우의 제주4.3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응원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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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3

김우선I기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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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선I기자
2023-03-27 07:50
저희도 5년 전쯤 아이들에게 4.3의 기억을 심어주기 위해 방문했는데 몰랐던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됐네요.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ㅎㅎ

MRMI리뷰어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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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MI리뷰어
2023-03-27 18:10
제주 4.3은 반드시 기억해야하고 치유되어야 할 역사라고 생각됩니다. 아이들에겐 조금 다가서기 힘든 내용이지만 그래도 그런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뜻깊은 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역사 현장들을 종종 데리고 다녔는데, 그냥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도 역사를 제대로 아는 시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김우선I기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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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선I기자
2023-03-28 09:25
네 당연하죠.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할 우리의 역사입니다. 이번 정부 들어서 왜곡되고 축소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데 사실을 후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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