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제주도우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제주의 가슴 아픈 현대사
본문
"우린 삼팔선이 그어진 중도 몰랐수다. 전쟁 중에 정신없이 살아서......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출국심사하는 맥아더 사령부 미군이 우리한테 물읍디다. 북조선으로 가겠느냐, 남조선으로 가겠느냐고. 허 참! 북조선, 남조선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말 아니우꽈? 그래서 물어십주. 북조선은 뭐고 남조선은 뭐냐고 하니까 삼팔선이 그어졌다는 거라예. 허, 그것참!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해십주.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 하고."
"맞아, 맞아, 우린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란 말이여!"_1권 295쪽
‘제주도우다’는 일제강점기 피폐했던 제주 사회부터 잠시나마 기쁨의 순간을 맞았던 해방, 그리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제주4·3까지, 가장 격동적인 제주의 현대사를 다룬다. 1978년 ‘순이삼촌’으로 제주4·3을 세상에 처음 알린 현기영 작가가 4년간의 작업 끝에 내놓은 결실이다.
제주4·3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다는 한 젊은 커플, 인터뷰를 위해 제주4·3을 직접 겪으며 그 시절을 살았던 조천리의 할아버지를 찾지만 할아버지는 당최 입을 열지 않는다. ‘그 사건을 당하고 나서 자신의 삶은 거기에서 멈춰버린 것 같다’면서.
어릴 적 할아버지의 꿈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제주4·3은 그의 꿈을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그 사건 후로는 모든 게 헛것으로 보여 무얼 쓸 수가 없었어. 모든 것이 헛것이고 그 사건만이 진실인데, 당최 그걸 쓸 엄두가 안 나는 거라, 무서워서. 지금도 무서워.....”_1권 15쪽
소설의 주인공인 안창세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현기영 작가의 독백처럼 들린다. 작가의 나이도 제주4·3 당시 9살. 제주4·3은 그에게도 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였다고 말해왔으니까.
총 3권으로 구성된 ‘제주도우다’는 제주4·3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며, 한국의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나 역시 제주로 이주한 지 8년째이고, 그동안 제주4·3 관련 강의와 더불어 다크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제주 곳곳의 4·3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사실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들과 함께 버무려진 제주4·3의 역사는 ‘제주도우다’를 통해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끝나지 않은 역사임을 실감하게 한다.
일제강점기 극심한 강제 공출과 징용, 노역으로 인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삶이었지만, 제주 사람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해방을 맞아 어리둥절하면서도 새 나라 건설을 꿈꾸며 희망에 부푼다. 일제의 항복으로 7만 군대가 떠나고, 그 자리를 육지의 형무소에 갇혀 있던 항일 인사들과 오사카 공장지대로 떠났던 이주노동자, 그리고 해외 도민 오만여명이 채운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돌아온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빈털터리였다.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 경제를 보호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 귀환자들에게는 조선의 은행에 예금한 돈 전부를 인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일본에서 출국하는 조선인 귀환자들에게는 담배 2보루 이하 정도의 금액만 지참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0여년 동안 피땀으로 모은 돈을 포기할 수 없어 그대로 일본에 눌러앉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해방과 더불어 제주 곳곳에는 무정부의 공백상태를 메우기 위해 치안대가 만들어지고 좌우합작 인민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도 전역이 활기를 띄었고, 일제 36년 역사의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 마을마다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교를 세우는 등 새로운 열정과 기운이 넘쳐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군은 인민위원회를 해체시키고, 일제의 착취 기구에 종사했던 자들을 행정에 그대로 복귀시킨다.
설상가상으로 제주는 해방 이듬해 극심한 가뭄까지 겪게 된다. 비 한 방울 없이 예상 외로 오랜 기간 이어진 가뭄, 그 끝에는 흉작이 기다리고 있었고, 흉작은 굶주림으로, 그리고 호열자(콜레라)라는 역병까지 창궐하기에 이른다. 지난 3년 동안 전 세계를 멈춰 세웠던 COVID-19처럼. 해방 직후 1년여 만에 제주도는 갑자기 불어난 인구, 흉년, 역병이라는 3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우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은 당시를 살았던 젊은이들이다.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해방 직후 새 나라 건설을 꿈꾸며 희망에 부풀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에도 빠진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발생한 제주4·3은 꿈도, 희망도, 사랑도 모두 앗아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삶까지 빼앗아가 버렸다.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산으로 들어간 건, 무언가 비장함 때문이 아니었다.
“매 맞은 사람들은 얼마 못 살고 죽기가 십상이었어. 그러니 입산할밖에. 그 사람들이 뭐 사상이 있거나 특별히 애국심이 많아서가 아니고 그냥 매 안 맞으려고 입산한 거라. 입산자 가족들까지 고문에 시달렸주. 젊은 여자에겐 남편 내놔라, 마흔 넘은 여자에겐 아들 내놔라 하멍 막 두들겨패는 거라. 자식을 살리젠 뇌물을 먹이기도 했어. 두들기면 돈이 나오니까. 그놈들이 돈이 좀 있을 것 같아 보이면 우익 활동을 하는 자라도 빨갱이 누명을 씌워 잡아다가 막 두들겨패.“_3권 114쪽
상황에 떠밀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입산자가 되었고, 군경토벌대의 무자비한 파괴 공작이 계속되면서 한 몸 같았던 도민 공동체도 분열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살아야 하니까.
‘제주4·3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최소 3만명이 희생되었고, 3만개 이상의 사건이자 슬픔이자 원한이 살아있다’고 늘 얘기해온 현기영 작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서 어떻게 버무릴까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작가는 완화된 표현을 썼다고 했지만, 3권을 읽을 때쯤에는 도저히 계속 읽어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지붕에 올라가 멍석을 덮어 불을 끄던 아낙이 총에 맞아 굴러떨어진다.
죽창을 겨누고 소리치며 토벌대에 달려들던 청년이 충에 맞아 쓰러진다.
좁쌀 항아리를 맞들고 서둘러 집 밖으로 옮기다가 엎어져 쏟아진 좁쌀을 쓸어담는 노부부를 향해 총알이 날아든다.
자기 집을 태우는 불길을 보면서 급기야 실성한 노인이 소리 지른다. "아이고 아이고, 시원하다! 잘 탄다. 잘도 탄다!" 그러고는 충을 맞고 쓰러진다.”_3권 191쪽
그래서 작가는 느리게 함께 걸어가자고 ‘작가의 말’을 통해 당부한다.
“그대가 이 소설을 읽기로 작심하였다면 그 길은 작가와 동행해 너무도 낯선 삶과 죽음의 비경을 찾아 가는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작가는 이것저것 살피면서 그 먼 길을 느리게 걸어갈 텐데, 독자도 그 느린 행보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_3권 363쪽
한 편의 장편 영화를 보는 듯한 소설인 ‘제주도우다’는 조천리에 뿌리를 내렸던 안창세 할아버지의 조상과 새콧알할망당 본풀이, 유독 반골 기질이 높았던 조천리의 항일 투사들, 일제강점기 피폐한 삶이지만 해녀들의 사랑방인 해녀불턱에서 웃음과 함께 피어나는 에피소드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세 곳의 군용 비행장인 읍내 정뜨르(현재 제주국제공항), 모슬포의 알뜨르, 조천면의 진뜨르(현재 제주시 삼양검문소에서 조천읍의 신촌사거리로 건설 중 중단돼 현재는 왕복 4차선의 도로) 등 제주의 문화와 역사에도 한발 더 가까이 들어가볼 수 있다.
연북정에 오르니 "열중쉬어! 차렷!"을 목청껏 연습하는 행필의 구령 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하다.
다만 한 가지,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가 제주어로 이루어지다보니 타 지역 사람들에겐 몰입도가 살짝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수없이 많은 사투리가 등장하지만, 제주어는 육지 사람들에게 많이 낯선 게 사실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이 제주어가 아닌 표준어로 대화한다면 그 또한 소설에 어울리지는 않을 것 같다. 표준어로 완전히 대치되지 못하는 제주어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이 점은 독자들의 양해가 필요해 보인다.
<lala_diman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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