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일일시호일>, 차 한 잔을 위한 단아하고 긴 여정에 인생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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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13(일본 개봉). 일본 100분
감독 : 오모리 다츠시
출연 : 키키 키린, 쿠로키 하루, 타베 미카코
줄거리 : 스무살의 노리코는 아직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다도가 그녀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할 때에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마음의 방황기를 거칠 때에도 따스한 찻물이 그녀의 매일매일을 채우기 시작한다.
기나긴 여름을 지나고 찾아온 달콤한 가을이 유독 빠른 발걸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을을 맞이하는 유나니 길었던 여정에 예쁘게 쌓여 있을 이야기가 궁금했다.
오래 전 놓쳤던 영화를 소환해 감상하면서 그 ‘이야기의 대략’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여름을 이겨내는 그 시간, 그 하루하루가 저마다의 ‘좋음’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만 딱히 뭘 하고 싶다거나 관심사가 있지 않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 그런 나이가 되었고 원하는 대학에 가지도 못한 노리코는 엄마의 권유로 다도를 접하게 된다. 고리타분한 전통이라 생각하면서도 노리코는 남다른 몸가짐에 똑 부러진 성격을 가진 다케다 선생에게 다도를 배워보기로 한다.
그저 차를 타서 마시면 될 것을, 다도에는 의미나 논리를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동작과 엄격한 규칙들로 가득하다. 방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왼발부터, 다다미 한 장은 여섯 걸음으로. 거기다 왜 그렇게 해야 하냐는 물음에는 의미는 몰라도 되니 어쨌든 그렇게 해야 한다고만 한다. 다실에 걸려 있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글귀는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리코는 다도 수업을 참 열심히 다닌다.
영화 초반에는 다도는 잠시 나오는 부분이겠거니 했다가, 1년이 되고 2, 3년이 되자, “어라, 차 만들고 마시는 방법을 뭐 저렇게 오래 배워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뭘 저렇게 배우고 또 배울 일인가 하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다도, 서예, 꽃꽂이에 참으로 진심인 나라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 일본에서는 다도, 꽃꽂이, 서예를 ‘덴토산도(伝統三道)’, 즉 ‘전통 3도’라고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이 그걸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하니, 그 진의 여부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정해 놓고 지켜내려고 하는 점에서는 높이 사고 싶다. 일본의 문화를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접하기 마련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네들은 ‘기모노’ 역시 우리네 ‘한복’보다 자주 입는다는 사실에도 가 닿았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부럽기도 했다. 속에 깃든 의미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전통’에 대해서는 전 국민이 존중하고 지켜내려는 느낌이 든다.
K 문화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고 하는데, 좀 더 전통적인, 한국적인 것에도 우리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다소 ‘애국적인’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이런 걸 느껴도 되는 건가 싶지만 그 동안 묵혀 있던 생각이 이 영화를 통해 터져나왔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하루 하루, 1년 2년 노리코는 다도를 배우고, 그 과정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성정해간다. 20대를 지나 30대, 40대에 이른 그녀는 여전히 다실을 찾아 한 주를 갈무리하고 있다.
그 지루하리만치 잔잔한 과정을 오롯이 따라가다 보니 인생이 꼭 대단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고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다도를 받아들이면서 절기와 날씨를 음미하고 그 속에 있는 자신을 그대로 느끼는 노리코에 집중하게 된다.
노리코가 처음으로 순수한 기쁨을 느낀 순간은 까다로운 규칙에 맞춰 몸이 절로 움직였을 때다.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다케다 선생의 말처럼 어려운 동작들에도 익숙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네 삶이 매일매일 다른 날이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고,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좀 더 수월해지는 때가 있는 것처럼.
또 하나 계절을 따라 달라지는 찻잔을 볼 때는 숨이 멎고 말았다. ‘개의 해’니까 개 그림이 그려진 잔에 차를 마시면 좋지 않냐는 대사는 형식을 중시하는 다도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때로는 잘 짜여진 형식이 우선 되어야 그 안에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살아가다 보면…
이제 노리코를 다실로 발걸음 하게 하는 것은 앙증맞은 화과자와 맛있는 차가 전부가 아니다. 모든 계절을, 모든 날을, 모든 순간을 음미하는 다도의 방식에 눈을 뜬 것이다. 결국 노리코가 스승인 다케다에게 배운 것은 차만이 아니었다. 살아가는 방식, 살아가기 위한 마음의 균형이었음을 카메라는 참으로 지극하게 담아내고 있다.
“같은 사람들이 여러 번 차를 마셔도 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아요. 생에 단 한 번이다 생각하고 임해 주세요.”
“무거운 것은 가볍게 들고, 가벼운 것은 무거운 듯이 드세요”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다도란 그런 ‘삶의 방식’인 것이다.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바로는 알 수 없는 것’ 두 종류가 있다.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한 번 지나가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바로 알 수 없는 것은 몇 번을 오간 뒤에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이국적인 다도의 이모저모, 일본의 사계뿐 아니라 시간을 따라 조용히 깊어가는 노리코의 삶을 함께 보여준다. 모든 인생이 늘 커다란 이벤트나 굴곡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 그럼에도 매일매일 희노애락은 존재하고, 시간을 들여 지속하는 연습은 그것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잡아주고 자연스럽게 대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다도와 영화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다른 삶을 살고 있고 그 삶이 얼마나 소중하며 그 속에서 하루하루의 기쁨을 찾아가고 있다고 보여준다.
<tomyi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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