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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리뷰]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아픔, ‘제주 4.3’의 흔적을 좇아➀ 관덕정과 제주4·3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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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타임스=라라 리뷰어] 

오는 4월 3일엔 ‘제주 4·3’ 75주년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다. 한라산 금족령 해제로 제주도 전역을 피로 물들였던 ‘제주 4·3’이 완전히 종료된 건 1954년 9월이지만, ‘제주 4·3’은 수십여 년간 입 밖으로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아픔이었다. ‘제주 4·3’이 처음 세상에 드러난 건 1978년 발표된 현기영 선생님의 단편소설 ‘순이삼촌’을 통해서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 ~ 5월 27일까지 열흘 간의 사건이지만, ‘제주 4·3’이 지속된 건 무려 7년 7개월이다. 제주도를 방문한다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곳, 제주국제공항에서도 수백여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 제주 전역 곳곳에 서려 있는 아픔도 함께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 곳, ‘관덕정’을 시작으로 ‘제주 4·3’의 흔적을 하나씩 쫓아가본다.

 

1978년 발간된 '순이삼촌(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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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3만여 명이 운집했다. 북초등학교에서 기념대회를 마치고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문통으로 가두행진을 하던 군중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의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6살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는데 경찰이 그냥 가려 하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주민 6명 사망, 8명 중상.

무려 7년 7개월 간 제주도를 피의 섬으로 물들인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1907년에 개교한 제주 북초등학교. 교가 1절 첫 줄이 '백두산 뻗은 줄기'로 시작한다.

제주도는 동네마다 같은 날 제삿집이 많다.

제주43사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_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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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돌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가 끝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 우리가 스스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기에 일본의 자리를 미군정이 대신한 것에 불과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니, 한국은 강대국에 끌려다니다가 자칫 분단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해방 이후 제주도의 상황은 육지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일제가 물러갔다는 소식에 일제강점기 돈을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제주도로 돌아왔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30만명 정도.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의 수가 무려 6만여 명에 달했다. 엄청난 인구가 급증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미군정의 제재로 인해 일본에서 번 돈을 거의 갖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은 넘쳐나는데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고, 여기 더해 사회불안까지 가중되었다.

 

당시 제주도의 문제를 (물론 여러 가지 환경이 있지만) 두 가지 정도만 꼽는다면 첫째, 곤궁한 삶 속에 갑자기 늘어난 인구, 둘째 일제 강점기 시절의 관리들이 그대로 관직에 앉아 끊임없이 벌어지는 부정부패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제주도에서는 흉년, 역병, 흉년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손으로 나라를 되찾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사람들이 외친 구호는 단 하나, "3·1 정신으로 통일 독립 쟁취"였다.

 

 

그러나 1947년 3월 1일, 어린아이를 다치게 한 무장경찰에 대한 사과 요구에 경찰은 발포로 대응했고,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사건 9일 뒤인 1947년 3월 10일, 제주도에서는 이 사건에 항의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단행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않았다. 제주도를 'red island(붉은 섬)'으로 규정짓고, 억압 통치에 나섰다.

 

본토에서 응원경찰이 대거 파견되었고, 극우 청년 단체인 서북청년회도 제주도로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고,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8년 4월 3일, 한반도의 분단을 막고자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해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미군정의 억압 통치로 경찰에 끌려간 인원만 2500여명에 달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았고, 5·10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무장대간 평화협상이 성사되기도 했으나 협상 사흘 만에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을 방화한 ‘오라리사건’이 발생하면서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미군정의 강경 토벌작전이 계속되었고, 1948년 10월 11일에는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이로 인해 중산간마을들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모두 소각되고 주민들도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그리고 한달여 만인 1948년 11월 17일에는 계엄령까지 선포되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이 실시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전면 해제될 때까지 무려 7년 7개월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이 계속되면서 주민 2만 5,000~3만 명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제주4·3 희생자 각명비 : 제주4·3 희생자로 결정된 14,231명에 대한 기록이다.

 

올해로 벌써 75주년을 맞는 ‘제주 4·3’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제주 4·3 사건’이라고 흔히들 부르지만 이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제주 4·3’이란 명칭만을 사용했다.

 

* * *

 

1. ‘제주 4·3’의 시발 지점, '관덕정'

매년 봄의 시작인 탐라국입춘제가 열리는 관덕정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 곳 관덕정.

 

관덕정은 세종 30년 신숙청 목사에 의해 창건된 제주목 관아의 부속 건물로 제주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군사들의 활쏘기, 과거시험, 각종 진상을 위한 봉진행사 등이 이뤄졌고, '이재수의 난' 당시에는 300여인의 교인척살이 이곳에서 있었다 한다.

 

‘제주 4·3’의 와중에는 무장대사령관인 이덕구의 시신을 전시한 피의 공간이기도 했고, ‘제주 4·3’ 이후 제주 지역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과 4·3 진상규명 운동도 모두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관덕정의 천정에는 적벽대첩도, 대수렵도, 십장생도 등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작자는 미상이라지만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관덕정을 가게 되면 잠시 마루에 걸터앉아 그날을 잠시 떠올려보자.

 

* * *

 

2. 제주 4·3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은 봉개동, 한라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제주 4·3’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위령·추모의 장이면서 동시에 평화·인권·교육의 장으로 후세대에 역사적 교훈을 물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약 12만평의 부지에 조성된 공간이다. 매년 4월 3일 희생자 추념식이 이곳에서 열린다.

 

공원 한가운데 위령탑이 자리하고 있고, 공원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제주4·3평화기념관이다. 가장 먼저 들러봐야 할 공간이다.

 

 

기념관 입구로 들어가 지하 1층으로 들어서면 상설 전시실에서 4·3사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6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으므로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 된다.

 

제1관은 역사의 동굴(프롤로그),

제2관은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제3관은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제4관은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제5관은 평화의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제6관은 에필로그 순이다.

 

이름없는 비석

 

방문하기 전, 상설전시실의 해설을 먼저 들을 수도 있다.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에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최태성 선생님의 해설로 ‘제주 4·3’의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기념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입구 쪽에 이렇게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위령탑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제주4·3 희생자 각명비. 희생자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은 것으로, 이곳에 적힌 희생자수는 14,231명이라고 한다.명단에는 1948년생, 당시 6세의 아이도 있다.

 

* * *

 

'제주 4·3'에 대한 진상조사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000년에 제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좌제와 더불어 빨갱이라는 낙인 탓에 수십년 동안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진실은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는 데는 심방(굿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육지의 무당)들도 많은 힘을 보탰다고 한다. 직접 말하지 못하는 진실을 심방을 통해 밖으로 쏟아낸 것이다.

 

4월 3일 오전 10시부터 1분간 제주 전역에는 묵념 사이렌이 울린다. 함께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 * *

 

3월 말부터 곱게 피었다가 지는 토종동백꽃은 '제주 4·3'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의미를 알고 나면 동백꽃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겨울철 그 고장에 관광 갔던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_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중에서...

 

<lala_diman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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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7

편집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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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2023-04-02 10:16
리뷰 업로드에 올라온 글을 정리하면서 뭉클해지는 건 처음이네요.
제주의 아픈 역사 정말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그리고 오래토록 기억하기를...

김우선I기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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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선I기자
2023-04-02 10:25
제주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 제주의 아픔도 함께 보듬어야 한다는 구절, 너무 와닿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아름다운 관광지만 갈 게 아니라 이런 곳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ㅠㅠ

안병도I기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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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도I기자
2023-04-03 08:49
예전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질 않아서 저는 이 사건을 서른 넘어서야 알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명예회복과 추모를 제대로 하게 됐으면 합니다.

수시로I리뷰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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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I리뷰어
2023-04-03 09:57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겠죠.

김우선I기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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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선I기자
2023-04-03 11:02
그러게요. 굥은 대통이 된 이후 대구 서문시장은 3번이나 내려가서 처묵처묵하면서 제주 4.3추념식에는 작년에 갔으니 뭐하러 또 가냐고 안내려가고 대독을 시켰다네요. 미래가 암울합니다.

수시로I리뷰어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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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I리뷰어
2023-04-04 08:34
더 가관은 한덕수 허수아비가 읽은 그 연설문이 작년 것과 같다라네요.

곰돌이아빠I리뷰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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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아빠I리뷰어
2023-04-03 17:38
해방전후 여순사건, 제주4.3 등 너무도 안타까운 사건에 희생된 국민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여순 반란, 제주 4.3반란으로 배웠죠.

단순히 시대의 아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상처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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