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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리뷰]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아픔, ‘제주 4.3’의 흔적을 좇아 ➃ 잃어버린마을 곤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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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타임스=라라 리뷰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배로 간주한다

 

7년 7개월 동안의 제주4·3 전 기간을 통틀어 '광풍'이라고 불릴 정도의 민간인 대학살이 집중적으로 시작된 1948년 10월 17일의 포고문이다. 이 포고문은 곧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해발 200m~600m)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바닷가 마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포고문이 발표되고 한 달 후인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 중산간마을에서 95%에 달하는 가옥(약 3만여 채)이 전소됐다 한다.

 

 

2003년에 발간된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당시 집계된 '잃어버린 마을'은 총 84개였지만, 이후 2019년 제주4·3평화재단이 추가로 조사한 결과, 전소된 마을은 총 134개였다고.

 

134개 마을 중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피신한 소위 산사람들에 의해 불태워진 3개 마을을 제외한, 나머지 130여개의 마을은 군인, 경찰 등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된 마을들이다.

 

 

그래서 제주시 화북동, 제주항 근처의 작은 마을이었던 곤을동엔 지금 집터만 남아있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7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 단 이틀 만에 불타 없어진 것이다.

 

바닷가 앞에 위치한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곤을동. 중산간 마을도 아닌데 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일까?

 

굳이 이유를 꼽자면, 곤을동 마을엔 대대로 지식인과 학자가 많았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토벌대들의 포위망이 좁혀지기 시작하자, 마을의 몇몇 활동가들이 별도봉을 넘어갔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는데, 토벌대가 이들을 색출하겠다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는 것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틀 만에 사라진 60여 가구의 반농반어 마을

 

곤을동이란 명칭은 '늘 물이 고여있는(좋은 물이)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물이 풍부하고 해변가에 위치해 있으니 농업과 어업을 같이 했던 마을이다. 화북촌을 사이에 두고 바깥 쪽에 있으면, '밧곤을', 안쪽에 있으면 '안곤을', 중간에 있으면 '가운뎃곤을'로 불렸다 한다.

 

일제시대 말에는 일본군이 개인호를 파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평 50여 미터 이상의 굴을 파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등 일본군의 ​군사기지가 됐는데, 이때 제주 각처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징용돼 왔다고 한다.

 

 

곤을동 마을에 원래 살던 가구는 67 가구.

 

전 가구가 1949년 1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사라져 버렸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쯤, 1개 소대 40여 명의 군인들이 곤을동을 포위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이들은 집들을 수색하고 돌아다니며,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껌벅이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했다. 모인 사람들 중 나이가 젊은 사람 10여 명을 골라내 곤을동 바닷가로 데리고 가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는, 마을 주민들을 화북국민학교에 가둬 놓고 곤을동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1월 4일에 불탄 곤을동의 집은 안곤을이 22채, 가운뎃곤을 17채란다. ​

 

학살은 1월 5일에도 이어졌다. 화북국민학교에 가둬두었던 주민들 중 젊은 사람 12명을 모아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속칭 '모살불'에서 학살했다고 한다. 주민 학살에만 그친 게 아니라 곤을동에 남아 있는 집들도 불태웠다. 밧곤을의 28채 가옥이 이날 모두 사라졌다.

 

67호에 달하는 마을이 단 이틀 만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살아남은 주민들은 밧곤을 동측의 화북리 등으로 옮겨졌지만, 이때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마을 주민이 약 30명이라 한다.

 

 

폐허로 변한 마을은 현재 집과 집을 구분 지었던 울담(울타리 돌담) 정도만 남아 있다.

 

마을터가 작아 보여 물으니 그나마 울담이라도 남아있는 지금의 흔적은 과거의 안곤을 마을이라고 한다. 가운뎃곤을의 경우는 밭터로 변해버려 마을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단다.

 

사진 속 울담들이 집과 집을 구분하던 경계선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똥돼지가 살았던 제주의 옛 화장실인 돗통시의 흔적도 보인다.

 

 

곤을동이 고향인 사람들은 그래서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한다.

 

기억 속 그날을 끄집어내는 게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다. 그래도 원주민 세 분이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곤을동 마을터 바로 건너편, 바닷가 앞 멋진 풍경을 안고 있는 카페 ‘곤을커피’의 주인장도 고향으로 돌아온 세 명의 원주민 중 한 명이다. 정성스레 가꾼 정원이 아름다운 카페, 운 좋게 얼굴을 뵙게 돼 인사를 나누니 얘기가 듣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라신다.

 

 

곤을동 마을터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있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간다.

 

안내판이 있으니 잠시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읽어보고 가면 좋겠다.

 

 

'어디가 가장 많이 피해를 입었어요?'

 

"이 지도 보이시나요? 제주도가 전부 붉은 색이죠? 제주 전역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굳이 어느 마을이 피해를 많이 입었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겠지요?“

 

제주4·3 해설사분과 함께 했던 이날의 다크투어, 이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맴돈다.

 

<lala_diman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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