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리뷰] 구한말 비운의 역사를 품고 있는 덕수궁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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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서울 시청 부근에서 행사가 있어 나갔다가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길래 근처 덕수궁을 걸어보기로 했다. 덕수궁 들어서자마자 소나기가 내려 우산도 없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덕수궁을 어룽진 눈으로 둘러봤다.
조선시대엔 5개의 궁궐이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원래는 경운궁)이 그것이다. 덕수궁의 역사를 알아본다.
덕수궁은 가장 작고 초라한 규모인데, 원래 궁궐이 아니었다. 1469년(예종 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영달의 집 터였는데 이 집을 몰수하여 1470년(성종 1년) 성종이 세종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에게 내려주었고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 이후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제사를 맡으면서 이곳을 하사받아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남았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다.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으로 불렀다. 그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경운궁은 궁궐로서의 역할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종이 1896년 2월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했는데 경운궁에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등 건물들을 지었으며, 명성황후의 빈전과 역대 선왕의 어진을 경운궁으로 옮겼다. 이듬해 1897년 2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했다. 고종이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으로 옮긴 이유는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과 거리가 가까웠고 프랑스공사관, 독일영사관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간 이유는 다들 알 것이다. 동학혁명을 차단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렀고 그걸 막기 위해 일본 군대가 파견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명성황후가 러시아에 손을 내밀자 일본은 자객들을 보내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했다. 살려달라고 무릎꿇고 빈 고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을 목격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태극전(현 즉조당)에서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하여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이 되었다. 석어당과 즉조당 두 채의 건물만 남은 경운궁을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나 고종은 윤허하지 않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 이 일로 1907년 고종은 황태자인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순종은 돈덕전에서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면서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고종의 거처가 된 경운궁은 순종이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으로 고쳐 불렀다. 고종은 1919년 1월 함녕전에서 슬픈 여생을 마감했다.
고종 승하 이후에도 일제는 덕수궁을 철저히 파괴했다. 덕수궁을 공원으로 조성해 일반에 개방한데 이어 석조전을 덕수궁 미술관으로 개관해 일본 근대 미술품을 전시했고, 돈덕전이 있던 자리에는 동물원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덕수궁은 구한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아픈 역사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다. 광복된 후에도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신탁통치를 논의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국가적 위기의 중심에 있던 상징적 공간이었고 궁궐 중 유일하게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로 남아 있다.
지금부터 주요 건물을 둘러보자.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남쪽으로 난 인화문이 정문이었는데 동쪽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꾸었다.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대한문 앞 월대가 1910년에 사라졌다가 2023년 7월 복원되었다. 매일 오후 2시에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된다. 덕수궁을 지나자마다 돌다리인 금천교가 있는데 일제가 자동차가 드나들기 위해 없앴는데 1986년 발굴 복원했다.
금천교를 지나면 조원문이 있는데 일제 때 헐어 현재는 없다. 중화문이 나오는데 중화전의 정문이다. 덕수궁 대화재때 소실됐지만 1904년 새로 만들어 세웠다. 중화문을 지나면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 있다. 중요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었던 곳이다. 원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는데 화재 때 소실되어 단층건물로 중건되었다. 중화전 앞 바닥은 박석이 깔려 있는데 일제가 박석을 모두 제거하고 잔디를 깔았다가 우리나라 정부가 다시 박석으로 교체했다. 중화전은 조선왕궁의 정전이 아닌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천정에는 쌍룡이 조각되어 있다.
중화문과 중화전 주위로는 100여채 넘는 행각이 있었는데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모두 헐리고 행각 한 채만 남았다.
덕수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석조전이다. 돌로 지은 건물로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근대식 황궁 건립으로 추진됐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를 맡았고 1910년 준공됐다. 르네상스식 건축으로 3층 건물이고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인 오얏꽃이 곳곳에 조각되어 있다.
덕수궁에 2023년 일반에 공개된 건물이 있다. 돈덕전이다. 고종 즉위 40년을 맞아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신축한 건물이다. 황제와 황태자를 만나기 위한 접견 장소와 연회장, 해외국빈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일제가 공원으로 만들 때 없앴는데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를 마치고 2018년 공사를 시작해 2022년 12월에 완공했다.
준명당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외국 시절이나 신하들을 맞이할 의례 공간으로 새로 지었다.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걸었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2년 고종의 회갑나이에 늦둥이 덕혜옹주가 태어났는데 고종은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준명당을 유치원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석어당은 ‘옛날에 임금께서 사시던 집’이다. 덕수궁에서 유일하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중층의 목조 건물이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가 환도한 후 거처했던 곳으로 선조는 1608년 2월 이곳에서 승하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모후인 인목대비를 유폐되었던 곳으로 당시에 서궁이라 불렸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곳으로 데려와 폐위시켰던 곳이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함녕전이 지어질 때까지 침전 및 생활공간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서양식 건물 정관헌도 눈길을 끈다. 정관헌은 함녕전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덕수궁 내에 만들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1900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차양과 난간은 서양식처럼 꾸몄다. 고종이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다.
함녕전은 고종 황제의의 침전이다.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함녕전이 소실된 이후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중건했다. 고종은 국권을 빼앗긴 후 1912년 함녕전으로 돌아와 1919년 1월 21일 이곳에서 승하했다.
덕수궁의 비 내리는 풍경을 짧게 담아본다.
https://youtu.be/X3TRvr6KwVA?si=wWMg-qGvxL9ElCMk|X3TRvr6KwVA
<ansonny@review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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