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리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독립문’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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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 경복궁역에 있는 관계로 출퇴근길에 금화터널로 연결되는 현저고가차도 위를 달리는 버스에서 항상 독립문을 바라보며 지나친다. 독립문은 역사책에서만 본 사진으로 기억 속에 있었지만 고가차도 위에서 본 독립문은 볼수록 신기하다. 왜 파리 개선문처럼 만들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왜 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우연찮게 독립문역에 내릴 일이 있어 독립문을 직접 볼 기회가 생겼다. 3호선 독립문역에서 5번 출구로 나가면 서대문형무소 방향이고 4번 출구로 나가면 독립문 방향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아이들과 한번 가봤던 곳이기에 패스하고 독립문 방향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4번 출구 나오자마자 오른편에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독립관이라는 한옥건물이 하나 있다. 유관순 동상이 보이고 서재필 동상 그 뒤쪽으로 독립문이 우뚝 서있다. 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3.1 독립선언 기념탑, 유관순, 서재필 동상 등이 잇따라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은 필시 독립문 역시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독립문 건립을 추진하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독립문이 세워진 건 조선말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는1896년에서 1898년 무렵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 건축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독립문은 청나라의 간섭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니 독립문의 ‘독립’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개선문처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문이 아닌 기념비적인 의미로 만들었다. 독립문이 원래 있던 자리는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웠던 영은문(迎恩門)이 있던 곳이다. 영은문은 중국 사신들이 묵었던 숙소 모화관의 정문으로 1536년에 만들어졌다. 청나라가 망하고 유럽 열강들에 의해 반식민지화되면서 대한제국도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에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독립문 앞에는 아직도 영은문의 주춧돌이었던 두 돌기둥이 오벨리스크처럼 우뚝 서있다. 그걸 ‘서울 영은문 주초’라고 부른다. 웃긴 건 청나라와의 단절도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두 나라 간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청이 조선의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이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조선이 청에 납부했던 공헌, 전례 등을 모두 폐지한다’는 조항이 큰 역할을 했다.
독립문의 디자인은 서재필이 개선문을 본떠 스케치했고 독일 공사관 출신 스위스인이 설계를 했으며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조선 왕실의 기금을 지원받아 건축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96년 조선의 지원금 4400원을 받아 서재필, 박영효 등에 의해 친정부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고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도 함께 만들어지는데, 이 위원회가 훗날 독립협회가 된다.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만든 게 아니고 독립문을 만들기 위해 독립협회가 생겨난 것이다.
더 웃긴 건 이 독립협회에 매국노 이완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독립협회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 서재필은 고문이었다. 친정부 어용단체였던 독립신문, 독립협회가 주관이 되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지원을 받아 1897년 11월 완공된 독립문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이 되었고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과 태극기가 함께 새겨졌다. 이 독립문 현판 편액에 적힌 독립문이라는 세 글자는 이완용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이완용이 남긴 한문 서예 자료는 지금까지 후세에 전해지고 있을 만큼 명필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하나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독립문이 순수 석조 건축물인 것 같지만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는 점이다. 1917년에 수리공사를 하고, 1928년 기초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당시 조선총독부가 공사비 4000원을 들여 벽체 안쪽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는 것이다. 석굴암처럼 시멘트로 땜빵을 했다.
아무튼 독립문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본의 도움으로 조선이 청의 속국에서 벗어났다'는 조선총독부의 프로파간다에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다 훗날에는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는 문으로도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반에 독립문 앞에서 독립운동 집회와 시위가 열렸고,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독립을 위한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특히,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로 기능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문의 ‘독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독립이 아니었음을 알았으면 한다.
<ansonny@review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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